중산층의 기준이 바뀌면 나라가 성숙해진다
중산층의 기준이 바뀌면 나라가 성숙해진다
서상문(환동해미래연구원 원장, 본지 객원논설위원)
우리 기준으론 나는 하층민이지만 구미 기준을 적용하면 신분이 중산층(middle class)으로 상승한다. 조건은 동일한데 신분이 달라지는 이유는 중산층의 기준이 다르기 때문이다. 한국이 물질과 재산을 기준으로 삼는데 반해 구미는 정신, 문화와 삶의 질을 기준으로 삼는다.
선진국으로 갈수록 계층구분 기준이 물질 보다 정신적, 문화적 가치를 먼저 보고, 후진국으로 갈수록 물질을 중시한다. 자본주의화, 산업화와 더불어 생성, 발전해온 중산층은 경제적 수준과 사회문화적 수준이 중간 정도가 되면서 스스로 중산층이라고 의식하는 사회계층을 말한다.
여기엔 교육수준, 직업상의 지위 등 비경제적 요소까지 포함된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소득이 중위(전체 가구를 소득 순으로 나열했을 때 50%~150%인 가구)를 중산층으로 분류한다. 50% 미만은 하위층, 150% 이상은 상위층이다.
이와 달리 1990년대 한국경제기획원은 소득이 최저생계비의 2.5배가 넘고, 자가 혹은 독채 전세의 주택을 가지고 안정된 직업이 있으며, 고졸 이상의 학력자인 경우를 중산층으로 규정한 바 있다.
우리사회에서 이런 한국적 의미의 중산층이 나타나기 시작한 건 경제성장과 궤를 같이 한다. 그 이전 일제강점기에는 인구의 절대 다수가 생계곤란을 겪는 상황이었으니 중산층은 개념조차 생경했다.
현재 중산층 비중은 전체 인구 중 2007년 58%에서 2008년 56.4%로 감소했다(한국개발연구원 연구결과). 같은 해 통계청이 실시한 ‘가계동향조사’로는 중산층이 46.5%였다. 인구의 절반 가까이가 스스로 중산층이라고 여기고 있는 셈이다.
그러면 중산층이 먼저 형성된 유럽과 미국의 기준은 어떨까? 명문 옥스포드 대학에서 제시한 영국의 중산층 기준은 다음과 같다. 페어플레이를 할 것, 자신의 주장과 신념을 가질 것, 독선적으로 행동하지 말 것, 약자를 보호하고 강자에 대응할 것 그리고 불의, 불평, 불법에 의연히 대처할 것이다.
퐁피두(G. J. R. Pompidou) 대통령이 ‘삶의 질’(Qualite de vie)에서 설정한 프랑스 중산층의 기준은 다음과 같다. 외국어를 하나 정도는 할 수 있어야 하고, 직접 즐기는 스포츠가 있어야 하며, 악기 하나 정도는 다룰 줄 알아야 한다. 또 남들과 다른 맛을 낼 수 있는 요리를 만들 수 있어야 하고, ‘공분’에 의연히 참여하며, 약자를 도우며 봉사활동을 꾸준히 해야 한다.
미국의 중산층 기준도 맥락은 같다. 미국 공립학교에서는 중산층이라면 자신의 주장에 떳떳하고, 사회적인 약자를 도와야 하며, 부정과 불법에 저항하고, 자기 책상 위에 정기적으로 받아보는 비평지가 놓여있어야 한다고 가르친다.
이처럼 영국, 프랑스, 미국 세 나라가 중산층을 구분하는 기준의 공통점은 물질이 아니라 정신, 문화, 삶의 태도 혹은 방식이다. 자기만의 신념을 가지면서도 독선에 빠지지 않고 남들과 공생, 공존하면서 정의를 실현하려는 의지, 그리고 사회적 약자를 도우는 것이 공통적으로 중시된다.
프랑스는 문화, 예술의 대국답게 문화 예술적인 요소도 가미돼 있다. 정의를 실천하고 사회적 약자를 도우는 것은 동전의 앞뒤처럼 상호 관련을 맺고 있으며, 서양의 전통적인 기사도 정신과도 통한다. 이는 프랑스혁명 정신이 말해주듯이 근대성(modernity)의 영향을 받은 결과다.
이러한 정신과 문화가 바로 오래된 대륙이지만 유럽이 여전히 세계를 이끌어가는 저력이다. 구미에 비해 우리의 중산층 분류기준은 전적으로 물질의 유무다. 소득수준, 주택보유 여부, 직업의 안전성과 학력이 절대적 기준이다.
정신적 부분이 결여돼 있기는 직장인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 결과에도 마찬가지다. 즉 부채 없는 아파트 30평 이상 소유, 월급 500만 원 이상, 2,000CC급 중형 자동차 소유, 예금액 잔고 1억 원 이상 보유, 해외여행을 1년에 한차례 이상 다닐 것 등이다. 여기엔 구미의 정신과 문화적 개념이 빠져 있다. 학력도 구미에선 절대적 기준이 되지 않는다. 물질적 성취를 과시하고 겉치레하기 좋아하는 속물의 전형이다.
수천 년 동안 누대로 지속된 가난의 곤궁에서 벗어난 지 엊그제였으니 우리가 이렇게 된 것도 이해하지 못할 바는 아니다. 우리사회의 음지에는 아직도 끼니를 걱정하는 이들이 없지 않지만 절대빈곤은 사라졌다. 그 이전엔 서민들이 제대로 배부르게 먹어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물질적 성취의 갈구가 상대적 빈곤감을 부추기면서 경쟁적이 된 건 자연스런 일이다.
유럽에서도 19세기까지는 실리주의(實利主義, philistinism)가 중산층 사회의 지배적인 가치이자 추세였고, 돈이 성공의 유일한 잣대였으며, 재력을 사람의 가치로 봤으니 우리라고 특별할 순 없다. 하지만 우리가 구미로부터 배워야 할 게 있다. 삶의 의미를 물질적 향유에서 점차 무형의 가치를 추구하는 쪽으로 전환시킨 점이다.
중산층 가운데서 지식인이 늘어나고 정신성을 추구한 이들의 역할에 힘입은 바 컸다. 정신성이 높이 평가됨에 따라 프랑스어로 우리의 ‘졸부’라는 의미의 ‘누보 리시’(nouveau riche)가 천박한 부자라는 의미로 쓰이면서 이런 부류를 폄시하는 사회적 기풍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자본주의 발달과정 면에서 우리는 구미와 비슷한 전철을 밟고 있지만 과연 지식인과 지식사회가 그들처럼 역사적 역할과 소임을 다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이다. 학계, 언론계, 법조계, 교육계 등의 지식사회가 본연의 기능과 역할을 다하기 보다는 각각의 전문성을 부와 명예를 얻는데 쏟아 붇느라 배금주의화, 물신화 돼 있는 게 우리의 현실이지 않는가?
세월호 참사 발생의 사회적 배경이 물질만능, 성장지상주의의 부박한 천민자본주의와 부정부패였다는 사실은 우리사회가 숙성되지 않은 후진국 상태에 있음을 말해준다. 선진국에서 인재 발생이 빈발하지 않은 이유는 각종 제도가 합리성을 띤데다 성숙한 정신성이 근저에 놓여 있기 때문이고, 후진국에서 인재가 빈발하는 이유는 제도도 허점투성인데다 정신도 익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회기풍 혁신에 앞장서는 역할은 금전과 물질적 가치에 함몰되지 않은 지식인이 맡아야 한다. 그리하여 한국사회의 탐욕스런 성장제일주의, 비정한 경쟁 및 물신주의가 하루 빨리 정신과 문화, 삶의 방식 혹은 태도를 중시하는 쪽으로 치환돼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먼저 중산층의 기준이 구미처럼 바뀌어야 한다.
중산층 기준을 구미형으로 바꾸는 것은 후진국 상태에서의 탈피를 가능하게 함과 동시에 비정상적 수단으로 부를 이룬 상류층을 견제할 수 있는 여러 힘 가운데 하나다. 개개인이 이런 방향으로 사회를 발전시킬 필요성을 체감하고 절실해질 때에 비로소 선진국 진입로가 보인다. 그렇지 않고 골빈 상류층의 작태가 지속되면 선진국, 문화강국이 되기는커녕 나라가 거들나지 않을까 두렵다.
세월호 참사를 두고 한국이 물질적으로 좀 살만하게 됐음에도 정신이 뒤를 받쳐주지 못해 발생한 인재라는 해외언론의 지적은 한 마디로 우리사회가 그만큼 영혼이 없는 졸부들의 집단임을 에둘러 비판한 거나 다름없음을 알아야 한다.
위 글은 2014년 5월 29일자『경상매일신문』에 실린 칼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