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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방위청 방위연구소 전사부 초청 학술대회 참석 논문 발표

雲靜, 仰天 2012. 5. 8. 10:23

일본방위청 방위연구소 전사부 초청 학술대회 참석 논문 발표

 

일시 : 2005년 12월 8~11일

장소 : 일본 동경 방위연구소 전사부 강당

주관 : 일본방위청 방위연구소 전사부 

주제 : 한국전쟁 관련

발표논문 :「지정학적 관점에서본 毛澤東의 한국전쟁개입동기」

논문 구성 :

 

序言

. 韓半島에 대한 脣亡齒寒關係再認識

. 國家安保考慮自救策先制 發動

. 國內 政治的 目的達成하기 위한 國外 戰場化

結言

 

논문요지 : 본고의 결언으로 대신한다.

 

결언

 

정권장악 후부터 중국의 국가이익을 우선시하는 현실주의자로 입장을 바꾼 모택동은 주변국과의 관계에 대해서 과거 역대 중국왕조들이 중시해온 중국인 특유의 지정학적 안보관, 즉 이른바 脣亡齒寒관계로 인식했다. 순망치한의 관점에서 중국에게는 북한에 반미적이면서 친중국적 정권이 존속할 필요가 있었다.

 

모택동은 시기가 적절하지 않다는 이유로 일차 남침전쟁 발동에 대한 동의를 유보했지만, 김일성의 남침구상 자체에 대해서는 민족해방혁명전쟁으로 이해하고 그에 대한 지지의사를 표시했다. 그것은 한반도가 북한정권에 의해 장악돼야 한다는 원론적 입장이 반영된 결과였고, 즉각적인 전쟁 개입을 확약한 게 아니었지만 스탈린의 압박에 직면한 는 결과적으로 국익 보호 차원에서 내키지 않는 동의를 했다.

 

전후 미국의 중국 재진출을 늘 우려해온 모택동은 실제 한국전쟁 발발 직후 미국이 즉각 군대를 한반도에 투입시킴과 동시에 미 제7함대를 대만해협으로 급파시키자 미국의 한반도전쟁 개입을 한반도의 정치 군사적 통일에 국한된 게 아니라 궁극적으로 중국공격에 있고, 이 조치를 통해 한반도와 대만 대안 두 곳으로 재진출하려는 의도로 파악했다.

 

이에 모택동은 19501019일부터 6개 군단 약 29만 병력을 수 차례에 걸쳐 북한의 서북지역에 투입했다. 중국군의 개입은 한국전쟁의 상황을 완전히 뒤바꾸어 놓았고, 중국과 미국이 주요 전쟁 당사자가 된 국제전 성격으로 탈바꿈시켜 놓았을 뿐만 아니라 휴전이 성사될 때까지 북한정권을 지탱해준 버팀목 역할을 했다.

 

모택동이 전쟁개입을 결정하게 된 동기는 지정학적 측면에서 크게 두 가지로 가닥을 잡을 수 있다. 첫째, 북한정권의 붕괴를 막기 위한 목적이다. 둘째는 국내 전장화를 막기 위한 국외 전장화 조성 동기다. 전자에는 국가 안보적 측면에서 동북지역과 북한의 수풍발전소를 보호하려는 전략적 목표가 설정돼 있었다. 후자에는 예상되는 소련의 중국동북지역 진주 가능성의 사전 차단, 그리고 전쟁이 국내로 확대됐을 경우 맞닥뜨릴 몇 가지 위험스런 국면을 피하기 위한 의도가 내재돼 있었다.

 

첫째 문제와 관련해서 중국동북지역은 수도 북경과 화북지역의 안전에 직결되는 전략적 요충지일 뿐만 아니라 당시 중국에 남겨진 근대 공업시설 가운데 태반이 집중된 지역이기도 했다. 따라서 중국의 전략적 중핵지역을 방어하려면 그 주변을 방어해야한다는 순망치한의 관점에서 먼저 동북지역을 방어하기 위해 동북지역의 주변지역인 북한정권을 유지시켜야 했다. 동시에 신 중국의 경제복구에 기반이 될 동북지역의 공업시설을 보호하고, 또 그것의 지속적 가동에 필수적인 전력공급원인 압록강 대안의 댐과 발전소를 보호하려고 개입했다.

 

둘째 문제와 관련해서 과거 중국내로 진주해온 소련군의 철수가 문제가 됐던 역사적 전례에 비추어 볼 때, 모택동은 중소동맹조약에 근거해 스탈린이 전쟁에 개입할 경우, 그것은 독립주권 국가를 건설하려는 자신의 국가정책 목표와 존엄에 흠집을 낼뿐만 아니라 또 다시 소련의 압력을 받게 돼 국가의 주권이 침식당할 것이기 때문에 소련이 참전할 경우를 대비해 중국이 아니라 북한으로 진주하도록 유도하고자 한 의도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 동시에 미군의 중국동북지역 진격에 따라 발생할 수 있는 상황들, 예컨대 대륙 재반격을 시도하고 있는 장개석 국민당군의 개입과 대륙공격, 그리고 이에 촉발되고 연계될 대륙각지의 국민당 저항세력들의 각종 반공활동이 힘을 받게 될 상황과 그리고 각지에서 토지개혁에 반대하고, 토비들을 포함해 이념적 적대감을 드러내고 있는 반혁명세력의 반정부 투쟁이 정치 세력화될 계기를 미연에 방지할 필요가 있었다. 나아가 전쟁상황을 명분으로 동원체제로 유도하면서 신 중국의 정치적 과제들을 적극 추진해가고자 한 복안도 깔려 있었던 것으로 사료된다.

 

물론 여기에는 두 가지가 전제돼 있었다. 첫째, 미국의 한반도 개입의 최종 목적이 중국에 있다고 저의를 의심한 모택동이 미국의 북진을 기정사실화하고, 어차피 국경선을 사이에 두고 미군과의 조우가 불가피하다는 판단이었다.

 

둘째, 미국이 전쟁을 더 이상 중국으로 확대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이었다. 모에게 미군의 압록강 및 두만강 접근은 곧 자국의 안보를 보장해주는 국경너머 완충지대(buffer zone)가 사라지는 것을 의미했고, 그것은 심각한 안보위협이었다.

 

따라서 모택동은 미군의 동북진입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상황에서 차라리 적극적으로 개입함으로써 승기를 잡겠다는 전략을 취했다. 이를 위해서 미군이 압록강에 가까이 다가오기 전에 먼저 전진방어 지역을 확보해놓을 필요가 있었을 뿐만 아니라 유엔군의 북진 행로의 목진지 매복을 통해 적에게 중대한 타격을 가하겠다는 의도에서 현지방어가 아닌 전진방어를 위한 선제공격전략을, 나아가 자국영토를 이중으로 보호할 수 있는 국외 전장화 전략을 선택한 것이다. (끝)

 

 

방위청 산하 방위연구소 본관 전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