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쩐의 작가’ 변영환 화백의 초대전을 보고
‘쩐의 작가’ 변영환 화백의 초대전을 보고
'쩐의 작가' 변영환 화백이 이번에도 일을 냈다. 자신의 고향 천안에서 초대받은 초대전에서 또 한 번 그의 트레이드마크인 ‘쩐’으로 '쩐'의 유희를 벌이고 있다. ‘쩐’이란 속어로 돈을 가리킨다는 걸 모르는 한국인은 없다. 또 돈을 싫어하는 이도 없을 것이다. 돈 때문에 살고, 돈 때문에 죽는 인간들이다. 한 마디로 돈에 미친 세상이다.
그런데 작가 변영환에게는 오래 전부터 돈이 돈 이상의 무엇을 표현해내기 위한 오브제일 뿐 그 이상도 아니고, 그 이하도 아니다. 내가 관찰을 제대로 했다면 변 화백이 돈을 오브제로 사용한 초기에는 주로 동전을 많이 사용하다가 점차 종이돈으로 확장된 느낌이다. 진짜 한국돈 지폐와 달러를 사용하기도 하고, 그것들을 복사해서 쓰기도 한다.
그런데 이 보다는 작가가 돈을 오브제로 돈 이상을 조형해내려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바로 돈과 인간이 얽힌 이중성, 맹신성, 물신성, 돈의 순기능과 역기능이다. 한 마디로 돈과 사람들 사이에 존재하는 역설과 모순, 긍정과 부정이 공존하는 딜레마요 이율배반임을 체득케 하려는 것이다.
그 현장에 가보니 이번에도 변영환은 돈을 가지고 질펀하게 한 바탕 잘 놀고 있었다. 전시장 초입에 걸려 있는 전시 광고포스터부터가 심상찮다. “貨嚴의 딜레마”, 그가 이번 초대전에서 선보인 작품의 컨셉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華嚴의 세계와 쩐의 모순관계를 문제 삼아 보겠다면 "華嚴의 딜레마"라고 해야 할 것인데 화려할 華자 대신 재물을 뜻하기도 하고 貨幣를 말할 때 쓰이는 貨자를 썼다. 물론 작가가 의도한 바가 있어 그렇게 조어했으리라는 건 누구나 알 수 있다. 貨嚴의 딜레마라?
불교의 화엄 세계에서는 존재란 모두 똑같이 소중하다. 多卽一, 一卽多의 이 세계에는 만유가, 일체가 평화롭게 공존한다. 잘난 자도, 못난 자도, 주인도, 나그네도, 깨친 자도, 못 깨친 자도, 부자도, 가난한 자도 함께 존재한다. 잘난 자만이 법계를 장엄하는 게 아니라 못난 자도 똑같이 법계를 장엄한다. 깨친 자만이 법계를 장엄하는 것이 아니라 못 깨친 자도 법계를 장엄한다. 주인만 필요한 게 아니라 손님도, 나그네도 똑같이 필요하다. 잘난 자, 못난 자,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주인과 나그네가 무량겁의 重重緣起로 인드라의 그물코처럼 서로가 이어져 있는 것이다.
대학 시절 한 동안 불교에 심취한 바 있는 변 화백은 "華嚴"을 슬쩍 "貨嚴"으로 바꿔 놓고선 잘난 자와 못난 자, 주인과 나그네, 깨친 자와, 못 깨친 자, 부자와, 가난한 자처럼 인간 모두가 돈을 위해 살고 돈을 위해 죽는 모습이 바로 자신의 모습임을 일깨워주려고 작정한 듯하다. 物神性을 고발하고 즉물적인 인간사의 허망함을 질타하는 듯하다.
변영환 작가는 현대사회에서 학교에서나 종교에서나, 아니면 책에서나 살아가면서 무소유가 자신을 해방하고 자유롭게 만들며, 돈 보다는 인간이 먼저라고 가르치고 배우면서도 모두가 돈을 위해 미쳐 있는 자본주의사회의 모순과 딜레마를 “쩐”으로 현시한다. 작가는 쩐을 존중하고, 쩐을 희롱하고, 쩐을 비난하고, 쩐을 동경하고, 쩐을 풍자하고, 쩐을 만지고 싶어 한다.
변영환은 그 동안 이 염원을 수 없이 많은 행위예술로도 표현해왔다. 이번 전시회처럼 전시회 현장에서 동전과 지폐로, 또 다른 오브제를 동원해 "쩐의 바벨탑"을 쌓아올리고, 전시회가 끝나는 마지막 날엔 이 작지 않은 조형물을 발파하듯이 무너뜨리는 행위를 보여 온 그의 작업과 작품은 미술 고유의 공간을 넘어 행위예술로도 이어진다. 쩐이 좋은 것이어서, 최고의 가치를 지닌 것이어서 모두가 미친 듯이 추구하지만 결국엔 바벨탑처럼 무너지고 만다는 가르침을 망치로 뒷골을 강타하듯이 일깨운다.
변영환의 작품에는 쩐이 핵심적인 오브제로 동원돼 있지만, 그 쩐에 얽힌 인간과 인간사회의 얘기를 위한 오브제로 다양한 물건들이 또 동원되고 있다. 불상, 불경이 사경된 서예작품, 법전, 마네킹, 구두, 안경, 해골, 예수상, 불상, 로뎅의 생각하는 사람 조각상, 여러 가지 장난감, 나무토막, 철사 등등 갖가지다.
압권 중의 하나는 동전으로 돈 꽃이 만발하게 하듯이, 또 로뎅의 '생각하는 사람' 조각상이 돈을 생각하는 광경을 연출하듯이, 여기에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마녀인 메두사까지 소환시키고, 성스런 이미지의 예수와 부처까지 등장시켜 돈을 쫓다가 돈으로 망하는 인간과 세상을 풍자한다. 작가 변영환의 작품세계는 이러한 다양하고 기발한 오브제들로 쩐에 대한 사유의 깊이를 더하고, 성찰의 무게를 더해주는 장치에 그 묘미가 있다.
고향의 대표적인 미술관이 특별히 작가를 겨냥해서 초대한 이번 초대전은 천안이 낳은, 천안을 넘어선 “전국구” 작가 변영환이 지금까지 해온 작업의 중간 결산 정도쯤의 전시회가 아닌가 싶다. 초대한 측에선 지금까지 서울에서 선보인 것들을 고향에서도 베풀어달라는 무언의 바람이 들어가 있는 듯하다.
아무튼 변영환의 작품과 그 정신세계가 이제는 고향과 서울과 대한민국을 넘어 자본주의의 본고장 미국이나, 자본주의를 혐오해서 새로운 대안 이념을 만들어낸 사회주의 국가 중국 등지의, 지구촌 세계로 비상하는 자양분을 함축해가고 그의 열정과 에너지가 비축되는 여정이기를 기원해본다.
2021. 3. 7. 5:47
북한산 淸勝齋에서
雲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