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여행⑤ 4.3사건 기념관 견학 : 모든 역사는 새로 쓰는 현재사다!
제주여행⑤ 4.3사건 기념관 견학 : 모든 역사는 새로 쓰는 현재사다!
이번 여행 중에 늦었지만 꼭 가보고 싶었던 제주4.3평화공원과 기념관을 찾아가서 전시내용을 봤다. 수많은 전시물을 일일이 다 사진을 찍고 해설을 할 수가 없어 극히 일부만 찍어 소개하기로 하고 주요 사진들을 올려놨다.
한국현대사에서 가장 비극적인 사건을 꼽으라면 1947년 3.1절 경찰의 발포로 개시된 1948년의 제주4.3사건을 꼽을 수 있다. 현대사를 거치면서 우리에겐 너무나 많은 사건들로 억울하게 목숨을 잃은 희생자들이 제대로 갈 곳을 못 찾아가서 아직도 삼천리강토 상공의 구천을 배회하고 있는 듯하다.
4.3사건도 한국전쟁, 4.19의거, 광주 민주화운동, 천안함침몰사건, 연평도포격사건, 세월호침몰사건 등과 함께 사건의 진상과 책임자 처벌 재발방지를 위한 법령제정 등으로 고혼들의 원한과 응어리를 풀어주고 편히 쉬도록 달래줘야 하는 사건 중의 하나였다. 이 가운데 그런대로 비교적 온전한 법령이 만들어진 것은 4.3사건뿐이다.
몇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이 사건을 두고 진실공방과 평가가 엇갈려왔다. 한쪽은 공산주의자들과 그들의 사주를 받은 폭도들이 일으킨 반정부 무장투쟁이라고 규정한 반면, 다른 한쪽에서는 무고한 제주도민들이 국가의 무자비한 토벌과 진압에 희생된 사건이라고 했다.
사건의 실상을 밝혀내고 정당한 평가와 피해자에 대한 보상을 요구하기는 이미 1960년대부터 시작됐지만, 그때 마다 번번이 사건의 진상을 은폐시키려는 반민족, 반민주세력들의 반대와 공작에 의해 무산되거나 축소돼왔다. 4.3사건에 대한 진상과 함께 정당한 평가가 이뤄지기 시작한 것은 김대중 정권 때부터였다. 2000년 김대중 정부에서 4.3진상규명특별법이 만들어졌고, 진상규명을 위해 4.3위원회도 설립함에 따라 국가가 저지른 폭력이라는 사실을 국가가 인정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 뒤 노무현 대통령도 군경이 4.3사건을 진압한 것에 대해 국가의 책임을 인정했고, 친히 위령제에 참석해 제주도민들과 국민들 앞에 서서 정식으로 사과한 바 있다.
이로써 지금은 4.3사건 발발의 배경, 전개과정, 결과 및 영향 등에 관한 진실, 제주도민의 저항 및 희생의 정도, 국가폭력의 정도, 영향 등등이 완전하지는 않아도 상당히 자세하게 밝혀져 있다. 이렇게 되기까지에는 해원을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한 제주도민들의 노력에 힘입은 바 크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내가 뒤늦게 만나서 존경하게 된 제주 출신의 3선 의원 변정일 국회의원도 특별법안의 제정 통과 등에 혼신의 힘을 기울이신 분이다.
또 그 가운데는 제주출신으로서 제주4.3연구소 소장을 맡은 내 친구도 적지 않은 역할을 했다. 그는 나 보다 나이가 조금 많고 학번도 조금 빨랐지만 대학 시절 얼마간 나와 하숙방을 같이 쓴 룸메이트였고, 그 뒤 각기 일본과 대만으로 유학을 떠난 뒤에도 몇 년에 한 번씩 보는 것이었지만 만남을 지속해온 사이였다.
제주4.3사건을 두고 그와 내가 관련된 에피소드 한 토막! 내가 국방부 직할 연구소에 재직하고 있을 때의 일이다. 당시 본 연구소에서 2004년에 발간한『6.25전쟁사』, 제1권에 4.3사건에 대해 왜곡한 부분이 있다면서 그 친구가 깊이 관여하던 4.3연구소 측에서 시정을 요구한 일이 있다. 이 문제는 국회에서까지 연일 책임여부가 거론되고 있었고, 국방부 연구소에선 연일 대책회의를 열곤 했다.
나는 위 책의 집필자가 아니어서 직접적인 관련이 없었다. 나는 당시 국방부의 온당하지 못한 4.3사건에 대한 평가가 있다면 바로 잡아야 한다는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국방부가 아니라 정부의 그 어떤 부처도 잘못이 있으면 시정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이 생각은 세월이 지난 지금도 변함없는 원칙이다.
나는 내가 소속된 국방부 연구소의 입장에 관해 알려주기 위해 제주의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더니 그 친구가 내게 대뜸 한다는 첫마디가 전화통화를 녹음하고 있느냐고 묻는 것이었다. 순간적으로 나는 어이가 없었다. 친구를 도우기 위해 전화한 것인데도 내가 국방부 편이 돼 친구를 염탐하려고 전화한 것으로 오인한 것이었다. 나를 어떤 사람으로 봤기에 내가 그런 염탐이나 하는 하찮은 인간으로 봤을까 하는 섭섭함은 지금도 가슴에 남아 있다. 좋게 해석하면 워낙 긴장된 상황이었으니 친구 보다 4.3사건 관련 정당한 평가를 하게 하는 일을 우선시해서 그렇게 반응한 것으로 봐도 된다. 언젠가는 그 친구와 만나 그 때의 일을 얘기할 생각이다. 이번 여행에선 그 친구뿐만 아니라 여타 제주출신 친구들은 1명만 빼고 모두 만나지 않고 왔다.
아무튼, 4.3사건에 관한 괄목할만한 성과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사료발굴과 진상규명, 피해자에 대한 보상과 관련해 밝혀져야 되거나 보강 내지 실현돼야 할 부분이 없지 않아 보인다. 예컨대 4.3사건은 왜 하필 제주에서 발생했는가? 발포를 지시한 자가 이승만 대통령이었던 사실은 밝혀냈지만, 그 세력의 전모가 드러나지 않았다. 그리고 피해자나 그 유가족들은 왜 오랫동안 자신이 피해자라는 것을 밝히지 못했는지 심리적, 사회적, 정치적 구조가 규명돼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선 거시사와 미시사의 변증법적 결합에 의한 실상의 재구성, 일제 대신 미국이라는 새로운 제국의 출현을 가능케 한 제2차 세계대전을 계기로 재편된 미국의 세계질서 속으로 편입된 제주의 상황에 대한 심층적인 연구, 개인과 가족의 질곡과 수난이 민족사라는 서사 속에 용해된 상태에서 벗어나 온전히 개인의 서사로 만들어야 할뿐만 아니라 그것이 다시 한국현대사의 역사인식으로 자리매김 돼야 할 과제들이 남아 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내가 본 제주 4.3평화기념관을 대략적으로 소개한다. 이 기념관의 건물은 4.3 사건의 역사를 담는 그릇을 모티브로 디자인된 것이라고 한다. 이 건물 안에는 4.3사건의 시간추이에 따라 구성된 총 일곱 개의 전시실과 평화, 인권, 민주주의를 주제로 연중 전시가 개최되는 기획전시실, 개가자료실과 아카이브실로 구성되어 있다. 전시실별 전시내용의 주제를 소개하면 아래와 같다.
제1전시실 역사의 동굴(프롤로그)
4.3 당시 피신처로 활용되었던 천연동굴을 모티브로 조성된 입구를 지나면 4.3에 대한 正名을 기다리며 비문을 쓰지 못한 白碑가 누워 있다.
제2전시실 흔들리는 섬(해방과 좌절)
해방 전 국제정세와 제주도, 해방 이후 제주도민들의 자치 열망, 4.3의 도화선이 된 1947년 3.1발포사건, 3.10총파업과 군경의 탄압사건들이 그 이듬해 1948년 4.3봉기로 이어지는 과정 등이 표현되어 있다.
제3전시실 바람타는 섬(무장봉기와 분단 거부)
1948년 4월 3일 새벽 일부 제주도민들이 일으킨 무장봉기의 발생배경 및 과정, 그 뒤 군경이 벌인 초토화작전의 직접적인 원인이 된 5.10 단선 및 단정 반대 사건 등 당시의 역사적 상황을 이해할 수 있도록 구성되어 있다.
제4전시실 불타는 섬(초토화와 학살)
초토화작전과 그 이후 한국전쟁에 이르기까지 제주도민을 상대로 군경이 자행한 여러 가지 학살사건들을 다루고 있으며, 희생자들의 죽음이 다양한 형상의 아트워크로 표현돼 있다.
제5전시실 흐르는섬(후유증과 진상규명 운동)
4.3사건의 후유증, 민간에서 시작된 4.3진상규명 운동, 2000년 1월 ‘4.3특별법’제정, 진상조사보고서의 확정, 대통령 사과, 4.3사건으로 사망한 자들의 유해발굴 등 4.3이후부터 현재까지의 흐름이 정리되어 있다.
제6전시실 평화의 섬(에필로그)
좌우 벽면과 천장에 수많은 4.3희생자들의 사진이 걸려 있고, 4.3사건에 대한 기억을 평화와 인권의 소중함으로 다시 생각하게 만드는 공간이다.
특별전시실(다랑쉬굴)
1948년 11명의 민간인이 토벌대에게 질식사 당한 동굴을 발굴 당시의 모습 그대로 재현해 놓았다. 당시 긴박했던 피난 생활과 학살의 현장감을 느낄 수 있는 공간으로 구성돼 있다.
解冤의 퐁낭
제주의 퐁낭은 공동체적 만남과 회원의 신목을 동시에 상징한다. 해원의 퐁낭을 통해 4.3의 역사적 의의에 대해 생각하고 희생자의 영령을 위로할 수 있는 공간이다.
마지막으로 대강당에서는 4.3 관련 실내 행사들이 개최되며, 각종 영상을 볼 수 있는 시설이 설비 되어 있는데 규모는 2 좌석 200석이 마련돼 있는 크기다.
이제 지금부터는 주요 전시내용을 볼 차례다. 아래의 사진들은 모두 기념관에 전시된 것이다. 여타 사진자료들을 구해 보충할 수도 있지만 그렇게 하지는 않았다. 본 소개 글의 목적이 4.3사건 자체의 재구성에 있는 게 아니라 제주 4.3기념관의 전시내용을 전달하는 데에 있기 때문이다. 다만, 사진 아래에 덧붙여진 설명은 기념관측의 설명이 아니라 필자가 평소 알고 있는 내용을 보탠 것이다.
전시내용들 중 대만 2.28사건의 발발 원인, 일제의 "무조건항복" 여부 등등 몇몇 잘못 설명된 내용과 사실오류들이 몇 가지 눈에 띄기에 전시장을 다 둘러본 뒤 기념관의 담당 직원에게 오류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주면서 수정하면 좋겠다는 의견을 전했다. 직원은 수정하겠다고 했다. 그것들은 옥에 티였을 뿐, 4.3기념관이 이룬 성취가 전혀 손상되지 않는다. 1945년 8월 15일 당시 일제가 "무조건 항복"을 한 게 아니라는 사실에 대해선 참고용으로 본인의 기사를 아래에 첨부해놨다.
http://m.ohmynews.com/NWS_Web/Mobile/at_pg.aspx?CNTN_CD=A0002350977
한국현대사의 최대 비극 중의 하나인 제주4.3사건으로 유명을 달리한 수많은 사망자들을 애도함과 동시에 사건의 진상과 국가의 인정 및 평가와 보상까지 이끌어낸 제주도민들의 각고의 노력에 경의를 표한다.
2021. 2. 26. 05:17
북한산 淸勝齋에서
雲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