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얀마 현대사③ 아웅 산이 꿈 꾼 버마의 미래상
미얀마 현대사③ 아웅 산이 꿈 꾼 버마의 미래상
버마인이나 미얀마인들에게 각인돼 있는 불멸의 아웅 산=국가영웅의 이미지 또 그로부터 배태되는 아웅 산의 정치적 카리스마의 실체는 대영, 대일 반제투쟁과 국가독립을 위해 자신을 희생한 사실이다. 사실상 그는 영국의 식민지 상태로부터 벗어나는 국가독립의 쟁취를 최우선시 한 삶을 살았다. 그러한 삶은 말처럼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영국이 어떤 나라였는가? 우리 한국의 현대사를 이해하고자 할 때 일제 식민통치를 빼놓고선 절대 이해가 안 되듯이 인도, 파키스탄, 스리랑카, 방글라데시, 미얀마 등등 서남아시아 국가들의 현대사를 이해하고자 한다면 영국의 식민통치를 빼놓고선 절대 이해가 되지 않는다.
또한 일제의 식민통치와 북한 김일성의 남침이 민족사적 비극의 가시로 박혀있는 한국이 그렇듯이, 오늘날 미얀마에 가난, 무지, 혼돈, 오랜 군부의 독재가 지속되고 있는 것들은 대개가 다 근원적으로 대영제국이 뿌려 놓은 악의적인 유산 혹은 독소들에 연원을 두고 있는 것들이 태반이기 때문이다. 같은 영국의 식민통치를 받은 인도나, 인도에서 분리해나간 파키스탄, 스리랑카와 방글라데시도 대동소이하다.
영국이 식민지 모국이었다는 사실을 공통분모로 안고 있는 인도양의 패자 인도 그리고 버마의 영국령화가 정식으로 선포된 1886년 인도의 한 주에 편입돼서 영국의 식민지가 시작된 미얀마 사이에는 파키스탄과 방글라데시가 그랬던 것처럼 지울 수 없는 역사의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져 있다. 싫든 좋든 일제 식민통치의 유산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지 않는 한국이 그렇듯이, 동남아에서 서남아에 걸쳐 있는 이 네 나라들도 아직까지 영국이라는 식민통치가 박아 놓은 역사의 인에서 완전히 해방되지 않고 있다.
그런데 아웅 산은 이처럼 수십 년 동안이나 서구 제국주의의 패자로 군림해온 강대한 국가 영국과 싸워 독립을 약속 받아놓고 독립 실현 직전에 죽은 것이다. 따낀 꼬더 흐마잉(Thakhin Kodaw Hmaing, 1876~1964)이라는 버마인 시인은 자신의 시 「희생자 묘역」에서 피살된 아웅 산과 희생자들이 자신의 “문하생들이었다”고 소개하고 “아웅 산 장군과 그 희생자들 죽음에 참담한 슬픔을 겪고 있노라”라고 하면서 “어쩌면 아웅 산과 희생자들은 뜻하지 않는 결과를 부른 조급한 행동 때문에 죽었다”고 썼다. 그의 말대로 아웅 산은 정말 급하게 서둘렀던 것이 변을 당한 원인 중의 하나였을지도 모른다.
아무튼, 보죠케 아웅 산이 비명에 간 것은 버마의 135개나 되는 여러 다민족들 중 다수 종족인 버마족에게는 크나큰 손실이었다. 반면, 다수를 차지한 버마족을 중심으로 한 몇몇 종족에게는 그랬지만 그 외의 소수민족들에게는 손실이 아니라 반가운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민족문제는 현 미얀마 군부에게 군사쿠데타의 명분이 되어준 배경이었다. 이것이 무슨 말인지는 뒤에 가서 자세히 언급하기로 하겠다.
19~20세기 초까지 영국은 오늘날의 미국 같은 존재였다. 아웅 산이 땅 덩어리만 컸지 아무런 힘이 없던 최빈국 버마를 주권국가로 가는 초석을 다진 것은 오늘날의 대다수 ‘미얀마’인들에게는 영원히 기억될 공훈이었다. 버마의 독립을 위해 식민지 종주국 영국에 저항한 아웅 산에게 독립국가의 실현이 무엇보다 중요한 정치적 목표였다.
1947년 1월 영국을 찾아온 아웅 산에게 영국이 조건부이긴 했지만 독립을 약속했으니 소수민족들의 동의만 구하면 독립은 이뤄질 것이다. 그 목표가 달성되면 아웅 산은 독립된 조국 버마를 어떤 나라로 만들려고 했을까? 어떤 정치적 꿈 혹은 계획을 가지고 움직였을까? 당시 버마는 어떤 상황에 처해 있었기에 그것을 극복하려고 했던 것일까?
이 물음에 대한 답을 도출할 목적으로 아웅 산이 지향한 사상적 궤적을 추론해보기로 한다. 그 전에 먼저 독립 후 버마가 선택할 수 있는 國體와 政體를 객관적으로 짚어본 뒤에 아웅 산 자신은 어떻게 생각했는지 추적해보는 순서가 될 것이다. 상식이지만 국체란 주권이 누구에게 있느냐에 따라 구분되는 나라의 형태로서 군주국, 공화국 등이 있다. 정체란 통치권의 행사 방법에 따라 구별하는 국가의 통치 형태들인데, 크게 대별하면 입헌정체와 전제정체가 있고, 구체적으로는 군주제, 귀족제, 민주제, 공화제, 연방제 따위가 있다.
영국이 60여년 동안 버마를 통치하면서 남겨 놓은 제국주의의 정치적, 사회경제적 정체에서 벗어나거나 더 좋게는 이를 해체해서 버마를 어떤 나라로 만들 것인가 하는 점에서는 논리적으로 여러 가지 길이 있었다. 정치적 면에서는 어떤 국가를 만들 것인가 하는 국가수립(state building)의 문제에서 국체와 정체는 앞으로 국민 삶의 방향이 결정될 것이었으니 그 어떤 문제 보다 우선적인 고려대상이었다. 당시 버마의 현실상황을 바탕으로 논리적으로 따져보면 국체로서는 ①왕조국가체제로 되돌아가는 왕정복고의 군주제, ②귀족제나 과두제, ③자유민주주의의 민주공화정, ④의회를 인정하지 않는 나치즘이나 파시스트의 전재 등 네 가지 가능성이 존재했다.
군주제를 반대한 아웅 산은 먼저 버마가 왕정으로 되돌아가선 안 된다고 주장했다. 이는 전통주의를 고수한 기득권 세력과의 회피할 수 없는 투쟁을 의미했다. 아웅 산은 전통주의자들과의 이념논쟁에서 왕정은 더 이상 유용하지 않은 가치라고 반박했고, 지난 역사 속의 왕정은 2~3세대에 걸쳐서만 작동됐고, 그 뒤 파벌주의로 인해 허약한 상태로 지속된 이상 왕정은 더 이상 유용하지 않는 체제라고 논박했다. 레닌, 뜨로츠키 등의 러시아볼셰비키들이 혁명 후 직면했던 것처럼 이것은 필연적으로 구체제(앙상 레짐 ancien régime), 즉 왕조체제와의 절연과 청산이 전제돼야 한 것이었음은 물론이다.
아웅 산은 국민의 주권이 보장되는 공간은 사회이며, 그 사회로부터 기인하여 권력을 유지하는 공간이 국가라고 봤다. 왕정체제하의 사회는 신민의 공간이므로 사회가 국가를 형성하는 기초 단위가 되지 않는 것이라고 봤다. 그러므로 그는 현대사회에서 입헌군주제는 존재할 수 있지만 과거와 같은 절대왕정체제는 무용한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했고, 독립된 미얀마에게 요구되는 정치체제는 왕정으로 회귀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공화제라고 주장했다.
이처럼 권력을 국가가 독점하는 독재체제나 파시즘 국가에서 주권재민의 민주주의로 간다는 것은 이미 당시에도 공감대가 형성돼 가닥이 잡혔던 것으로 보인다. 남는 건 사회경제적으로 어떤 정치체제를 취할 것인가 하는 점이었다. 이와 관련해선 당시 버마가 처한 현실에서 크게 ①자본주의, ②제국주의, ③사회주의, ④국가사회주의, ⑤공산주의가 있었다. 이 다섯 노선의 범주를 벗어난 다른 노선은 존재하지 않았다. 좀 더 구체적으로 부연하면 이러했다.
첫째, 영국이 걸었던 것처럼 자본주의와 제국주의 국가체제를 그대로 이어 받아 따르는 것이다. 둘째, 제국주의 단계까지는 가지 않고 미국처럼 자본주의에 머무르는 것이다. 셋째, 제국주의와 자본주의의 폐해와 유산을 일소하고 북유럽의 수정주의식 사회주의 사회를 건설하는 것이다. 넷째는 국가가 자본과 생산수단을 모두 통제한 레닌 및 스탈린의 러시아 같은 국가사회주의 체제였다. 다섯째, 아웅 산이 창당한 버마공산당의 노선인 공산주의체제였다.
당시 버마 주변국 중 태국을 제외하고 영국의 식민통치를 받은 부실하기 짝이 없는 서남아시아의 대국 인도, 프랑스의 식민통치를 받은 베트남, 라오스, 캄보디아, 네덜란드의 식민통치를 받은 인도네시아 등의 동남아시아 국가들과 중국은 러시아식의 국가사회주의로 가고자 한 움직임이 있었다. 그 중 인도가 약간의 예외로서 영국의 구체제, 즉 자본주의를 완전히는 부정하지 않고 사회주의와 혼용하거나 결합시키려는 절충이 모색되는 동향이 보였다. 물론 인도에는 마르크스 이론 면에선 레닌에 필적한 벵갈 출신 공산주의자 로이(Manabendra Nath Roy, 1887~1954)처럼 급진적인 공산주의자들도 활동하고 있었다. 이 점은 버마 내에도 유사한 흐름이 있어 보인다.
이론적으로는 아웅 산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정치엘리트들은 영국이나 프랑스처럼 약소국을 침략하지 않으려면, 그리고 후진국 나라들과 평등한 관계를 유지하려면, 서구 열강의 제국주의 이념을 버려야만 한다. 제국주의이론을 만들어낸 레닌에 의하면 제국주의란 자본주의가 고도로 발달하면 자기증식을 멈추지 않는 자본의 속성상 타국에 대한 자본의 이식과 침탈 그리고 그 영토에 대한 침략이 필연적으로 뒤따르는 것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영국제국주의와 그 야류인 인도인들에게 저항한 버마의 엘리트들이 취할 수 있는 노선은 논리적으로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뿐이었다. 그렇지 않고 자신들도 타국을 침략하는 제국주의로 나아가겠다면 그것은 중대한 자기모순이다. 이 가운데 공산주의는 마르크스가 강조한 대로 자본주의가 상당 부분 발달해야만 사회주의로 전환할 수 있다. 그런데 버마는 자본주의가 그럴 정도로 발달한 상태가 아니었기 때문에 당장은 공산주의를 실행할 수 없었다.
영국으로부터 독립하면 버마를 어떤 식으로 끌고 갈 것인지에 대한 구상은 아웅 산이 인도를 방문한 뉴델리에서 1947년 1월 5일 일요일 저녁 ‘올 인디아라디오’(All-India Radio)와 나눈 대담(“아시아의 단일과 단결”)형식의 기자회견에서 밝힌 것에 일단을 엿볼 수 있다. 아웅 산은 이렇게 말했다.
“내가 런던에 가면 협상을 성공시키고 귀국해야 한다. 그렇게 하지 못하면 1월 31일 전이라도 정국은 막다른 골목에 부딪히게 될 것이다. 버마의 독립적 주권의 자격에는 의문이 없다. 우리는 완전한 독립을 원한다.” 다가올 그해 “4월에 있을 버마 총선거에서 중재 단계(intermediate stages) 없이 전국 국민의회 형태로 만들어져야하고, 현 버마 임시정부는 독립 이후 단시일 내에 과도정부로 전환해야 한다.”
위 기자회견에서 아웅 산은 “다양한 표면과 피부 색깔에도 불구하고 아시아의 역사와 경제적 단결을 위해서 아시아는 단합하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발언은 19세기 중반 명치유신 이전 일본의 국수주의자들이 서양 열강의 일본 개방 압력에 대해 아시아국가들이 단결해야 한다고 소리 높인 예들을 떠오르게 하는 대목이다.
역사적 배경과 맥락은 달라도 아웅 산의 이 발언에서 그가 영국, 프랑스 등의 제국주의국가들의 재침략을 우려했으며, 이의 현실화될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약소국들끼리 단결을 강조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실제로 전후 프랑스는 과거 인도차이나에서의 옛 식민통치의 ‘영광’을 다시 누리기 위해 인도차이나 반도로 재침입 했고, 그것이 크게는 나중에 미국이 유럽에서의 대소련용 군사력 재배치와 맞물리면서 프랑스 대신 전쟁에 개입하게 된 현대사의 최대 비극 중 하나인 베트남전쟁의 시발적 배경이었다.
또 아웅 산은 버마에 주둔하고 있는 영국군 부대의 철수에 관한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우리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버마에 있는 대부분의 영국 부대원들은 인도 군인들이다.” “외국 군대의 주둔을 원하진 않지만 과거의 경험을 통해서 외국 군대의 존재는 우리나라의 자유로운 민주선거를 동의하고 인정해 줄 것으로 믿는다”고 답변했다. 실제로 당시 버마 주둔 영국군은 영국 본토에서 보낸 영국군이 아니라 인도에서 보낸 인도군 용병이었다. (이 점은 구한말 군대해산 후 군대 자체를 용인하지 않은 일제의 식민통치 방식과 다름)
아웅 산은 외국군 철수의 결정을 연기 하되 그 대신 버마 정부는 모든 외국 군대가 버마 영토 안에 주둔하고 있을 때에는 온전한 통솔권을 자신에게 위임해줄 것을 요구했다. 당시 버마 주둔군의 통솔 권한은 동남아시아에 있던 연합군 총사령관의 손에 있었다. 아웅 산은 영국 총독 다음 서열의 선임 각료이면서 국방위원이기도 했지만 군대를 지휘할 권한은 없었다.
독립을 쟁취한다고 해서 이러한 모든 문제들이 일거에 다 해결되는 건 아니었다. 버마가 영국의 식민통치를 60년 넘게 받았으니 영국의 잔재를 털어내기란 말처럼 쉽지 않다. 새 술을 새 부대에 담으려면 전후 식민지로부터 독립한 모든 약소국 후진국들이 그랬던 것처럼 신생국 버마에도 오히려 더 많고 중대한 과제들이 산적해 있었다.
가장 일차적이고 가장 큰 과제는 버마 주둔 인도군의 철수, 군정 종식과 정부 형태의 결정, 의회운용, 소수민족의 독립 혹은 연합 여부에 대한 결정 등이었다. 독립 후 버마의 정체로는 버마 영내에 존재하던 135개의 소수민족을 모두 버마라는 국가에 참여하는 연방제 국가를 건설하려고 했다. 버마 독립 이후 버마의 의회와 정부조직 그리고 소수민족과 관련하여 아웅 산이 지도하던 정당의 의견에 대해 묻자 그는 이렇게 답했다.
“우리는 국경이나 지방에 있는 소수민족 시민들에게 저의 결정을 강요하고 싶지는 않다. 저들에게 더 많은 자치권을 주고 우리와 함께 연합할 수 있는 선택권을 주고자 한다. 이것은 버마 임시정부의 일관된 정책이다. 하지만 ‘국민자유당’(AFPFL)은 더 많은 것을 협상할 수 있도록 준비하고 있고, 만약 소수민족들이 완전한 자치의 시행을 원한다면 그들이 원하는 대로 해도 될 것이다.”
또한 아웅 산은 버마에서 인도를 모델로 한 과도내각을 조각할 생각은 없음을 분명히 한 바 있다. 그는 그 여부를 묻는 기자에게 “인도를 방문한 뒤로는 인도 모델에 대해서 언급하기가 망설여진다”고 했다. 위 말은 버마는 독립을 하면서도 영국식 내각을 구성하는 인도와 달리 버마는 완전한 독립을 원한다는 의미로 볼 수 있다.
또 한 가지 누가 권력의 주체인가 하는 점에서 아웅 산은 민주주의적 공화제가 아니라 국가사회주의국가의 건설을 지향했다는 점이다. 영국 등 서방국가들이 이룬 민주주주의가 결국 약소국을 침략해서 통치하는 제국주의국가가 된 사실에 대한 자각에서 얻은 교훈 때문이었다.
아웅 산이 영국이 남긴 식민지체제와 완전히 결별하고 세우고자 한 체제는 과연 어떤 것이었을까? 독립 후 아웅 산이 건설하려고 한 국가체제는 정부가 경제를 민간의 시장경제에 맡기지 않고 경제계획의 입안에서부터 실행과 분배에 이르기까지 모든 과정을 국가가 주관하는 국가사회주의였다.
모든 정책은 현실상황에서 출발한다. 현실은 과거 사실의 外化이기도 하다. 영국의 식민통치 시절 버마의 현실은 미곡과 산림자원 수출 등 주로 원자재 수출을 기본으로 한, 제국주의 영국의 자원 수탈처, 공산품의 시장이라는 형식으로 세계자본주의의 하부경제로 편입돼 있던 상태에 있었다. 그 시대 버마는 한 마디로 고전적인 식민지정책의 전형이었다. 즉 식민모국의 식량 및 원료, 자원의 공급지화 그리고 상품시장으로 기능했던 것이다. 버마에 대한 영국의 수탈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케이스는 정글로 뒤덮여 있던 이라와디강의 델타 일대를 개간하고 교통 등 수송수단을 확보해서 그 지역을 세계 최대의 미곳 생산지이자 수출지로 만든 것이다.
자본주의가 발달하지 못해 자체적으로는 더 이상의 경제발전을 이룰 동력이 구비돼 있지 않고 늘 제국주의의 착취의 대상이 돼온 이러한 산업구조의 상황은 독립 전후 아웅 산이 미래의 꿈을 꾸던 시기에도 달라진 게 없었다. 후술하겠지만 이 구조는 버마 독립 후 국가가 나섬으로써 국가가 주체가 된 경제개발계획을 추진했어도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더 중요한 점은 식민지에 협조한 매국노들을 척결하지 못한 점이다. 버마의 매국노들은 영국인, 영국의 정책에 편승해 버마로 진출해온 인도인, 중국인들과 거대한 이익공유의 카르텔체제의 한 패거리가 돼 있었다. 식민지를 겪은 신생국가들이 공통적으로 겪게 된 현상이지만 식민모국에 협력해서 출세와 부귀영화를 누린 친외세파, 요즘 유행하는 우리말로 “토착왜구”들을 어떻게 색출 제거했느냐하는 문제는 버마에도 있었다. 즉 친영파와 친일파를 완벽하게 척결하지 못했다. 특히 친영파들은 사회 각층에 포진해 있었다.
사실 당시 버마는 동남아 여타 국가들 보다 양질의 인적자원뿐만 아니라 풍부한 천연자원까지 엄청나게 보유한 잠재적인 부유 국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버마족뿐만 아니라 모든 자원이 외국인들에게 착취당하고 있었다. 아웅 산은 영국 식민지로 인해 버마의 경제권이 영국인, 인도인, 중국인에게 가 있다고 보았다.(이에 대한 구체적인 실상 및 수치는 다른 장에서 제시할 것이다.)
아웅 산은 외국인들이 장악한 경제권을 버마 국민에게 돌려주고 원상 회복시켜 주는 경제적 사회주의를 정책의 목표로 삼았다. 이 점은 아웅 산의 동지 우누도 마찬가지로 동일하게 생각했다. 즉 아웅 산과 우 누가 정치 경제 정책 면에서 경제구조와 운용원칙 상의 공통점이었다.
아웅 산이 주창한 국가사회주의는 제국주의에 대한 철저한 반동에서 기인했다. 그는 자본주의를 제국주의의 부산물로 보고 이를 반대했다. 버마의 사회주의는 영국 제국주의에 대한 반감에서 생성됐지만 역설적으로 그 길에서 버리고 제3의 길을 모색하게 되면 거의 필연적으로 도달하게 될 결론처로서 정치사상적으로는 마르크시즘에 대한 자의적 해석이었다. 영국 자본주의는 마르크스가 자본주의의 극한 상황이라고 정의한 제국주의가 아니었다. 아웅 산은 이를 하나의 국가이데올로기로 자리매김 한 셈이다.
아웅 산은 민주주의 국가에서 사실상 자본가와 대기업이 국민이 위임한 국가권력을 가진다고 봤다. 그래서 아웅 산은 자본주의를 극도로 경계했고, 국민의 이름으로 국가가 모든 생산수단을 통제하는 국유화가 필요하며, 이를 통해 노자 간에 협력하는 사회를 구축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다만 그는 생산의 분배라는 측면에서 국가구성원들 간에는 이익을 둘러싸고 반드시 충돌과 갈등이 일어나기 마련인데, 이 경우 국가는 가난한 대중의 편에 서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 뒤 버마 군부는 아웅 산의 이 유훈 같은 큰 방향을 철저하게 무시하고 군부의 이익만 추구하는 쪽으로 그를 배신했다.
이 점은 대기업, 정치와 정부, 즉 자본, 권력과 행정이 모두 대기업의 파이를 늘려주는 식으로 편파적으로 자본과 권력에 기울어진 불공정의 결과 노동자계층의 수난이 극심한 한국사회가 아니 미국 등 자본주의사회가 받아들여야 할 교훈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아웅 산은 마르크스가 말한 사회혁명을 거치면, 혹은 그것을 이루기 위해 레닌의 러시아가 단행한 것처럼 국민들을 계급화하려는 생각은 가지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평등을 지향하는 불교를 믿는 국민들이 90% 이상이라는 절대 다수의 불교국가인 버마사회를 한 순간에 계급화 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아웅 산의 현실인식에서 나온 결과였다.
아웅 산은 국가가 나서서 노자 간의 대립을 중재하고 주요 생산수단을 모두 국민의 이름으로 국가가 소유하고 계획적으로 경제를 운용하겠다는 이러한 체제를 ‘신민주주의’라고 칭했다. 아웅 산의 신민주주의는 중국의 모택동이 1940년대 후반에 제시한 ‘신민주주의’와 명칭이 동일하고 내용도 상통하는 점이 있긴 해도 모택동의 영향을 받은 것 같지는 않아 보인다. (이 점은 아웅 산이 한 때 중국의 공산주의 사상을 공부한 바 있는 사실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에 추후 면밀하게 재점검해야 할 부분임)
모택동의 신민주주의란 민주주의사회에서 사회주의사회로 넘어가는 과도기 단계로서 사회주의국가를 이룩해야 할 준비단계에 해당한다. 즉 부르주아지계급인 자산계급을 세분하여 나쁜 자산계급과 좋은 자산계급으로 나누고, 관료화된 제국주의의 주구가 돼 국부를 그들에게 팔아넘기면서 국내 노동자와 농민을 착취하는 매판자본가, 악질자본가계급을 척결의 대상을 삼는 반면, 소자산계급(쁘티 부르주아지)와 민족자산계급은 혁명의 아군으로 삼아 공산당이 노동자, 농민, 소자산계급과 민족자산계급을 지도하여 관료와 결합된 매판자본가계급을 발본색원한다는 것이 핵심이다.
이에 반해 아웅 산의 신민주주의는 제국주의에 반대하고 생산수단과 국가 산업을 국유화한다는 면에선 모택동의 그것과 궤를 같이 하지만 자본가계급을 척결해야 할 계급적 적이 아니라 그들을 일정 부분 협력하는 관계를 만들고자 한 점이 다르다. 또한 아웅 산에게 파시즘은 자본주의가 생산한 최악의 생산물이라고 규정하면서 양자는 금융자본이라고 그 명칭만 다를 뿐 속성은 동일한 것으로 봤다. 그의 인식대로 잉여물의 무질서한 생산과 부의 불평등한 분배를 야기하는 자본주의는 그 자체로서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아웅 산은 자본주의국가들 간의 경쟁은 상호 신뢰를 무너뜨리고, 인간과 국가 간 갈등을 확대시켜 모든 생산요소를 파괴하고 인간소외가 발생한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아웅 산의 이 같은 인식으로는 그가 서구의 자유민주주의를 지양하고 국가가 사회혁명에 주도적으로 개입해야 한다고 한 것은 자연스런 논리적 귀결이었다.
그런데 우리는 아웅 산이 제세한 국가사회주의의 실현 가능성을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아웅 산이 이루려고 한 꿈은 한 마디로 국가가 경제생산의 주체가 돼 계획경제에 의한 사회주의를 추구하는 것이었다. 어쩌면 그것은 짜르를 무너뜨린 볼셰비키의 러시아가 그랬던 것처럼 사회주의를 실행하기 위해 갖춰야 할 몇 가지 사회경제적 조건들이 구비돼 있지 않던 버마의 현실에서는 실현되기엔 불가능한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것은 그가 단명으로 죽는 바람에 이상으로 남았을 수 있는 가치였는지도 모른다.
아웅 산은 이념 진영의 논리에 천착하기보다 버마의 상황에 맞는 실용주의적 사회주의를 주창한 인물로 평가되고 있다. 그는 짧은 권력운용 시절 유럽의 나치즘과 파시즘을 표방하는 매우 급진적인 사회혁명을 추진했으나 버마의 역사와 당시 처한 상황을 통시적으로 관찰함으로써 독립국가의 이상향을 제시하는 현실 타협적이고도 온건적 측면을 보였다. 그에게는 사회주의란 지향해야 할 이상향이 아니라 자신이 정의한 자본주의가 배격된 민주주의국가를 달성하기 위한 과정상의 도구였다.
아웅 산은 정치활동 초기에 공산주의자와 연대를 모색했지만 그들과의 사이에 벌어진 이념적 갈등은 그가 온전한 사회주의자로 변모하는 계기가 됐다. 공산주의자들과 결별하기 전까지 그는 마르크시즘, 레닌, 스탈린, 트로츠키, 무솔리니, 히틀러의 수사법과 아이디어를 통해 그의 사회주의 사상은 완성됐다. 서구 정치이데올로기에 대해 토착적인 버마사회의 토대 위에서 재해석하고 이를 버마민족주의로 승화시키고자 한 것이 아웅 산의 전략이었다. 그의 정치이념은 마르크시즘에 토대를 두고 있었지만 그것의 적용은 버마의 역사와 현실을 고려한 것이었다.
여기에서 아웅 산의 사회주의가 전통주의자, 급진적 공산주의와 차별화되는 민족주의적 성향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그는 사회주의를 넘어 식민통치 시절 동남아에서 유행하던 민족주의로 넘어가는 과정을 보여줬다. 즉 그는 사회주의자이자 민족주의자였던 것이다.
또 한 가지 지나쳐선 안 될 게 있다. 국가가 사회주의를 주도하는 이상, 민중이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대중민주주의 요소는 찾아보기 힘들었다는 점이다. 이 점에서 아웅 산이 이루고자 한 국가사회주의는 강력한 국가가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공평한 분배를 통해 평등을 달성하는 사회개량주의라는 점에서 전체주의와 유사점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아웅 산에 따르면, 근대적 의회는 개인주의의 정신을 성숙시킬 수 있지만 동시에 행정과정을 지체시키거나 방해할 수 있는 훼방꾼이 등장할 수 있다고 경계했다. 그래서 그는 독일과 이탈리아의 사례를 언급하면서 하나의 국민, 하나의 정부, 하나의 정당, 한 명의 지도자만 필요하며, 개인주의와 같은 허튼 수작이나 의회 내 반대세력을 억제할 필요가 있다고 봤다. (Josef Silverstein, The Political Legacy of Aung San, 1993, p.20.)
아웅 산의 뜻대로 버마가 외세에서 완전히 벗어나 독립하고, 그가 자신의 기존 정치사상을 계속적으로 일관되게 고수한다는 것을 전제로 하면, 그는 사회주의독재나 파쇼체제로 나아갈 가능성도 없지 않아 보인다. 그의 정치사상 속에서 그런 요인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그는 왕정에서 삼권분립이라는 근대성을 득하는 방향으로 발전한 의회주의와 제도를 부정했기 때문이다.
아웅 산의 이 생각대로라면 의회 자체를 인정하지 않고 한 사람의 강력한 정치인이 이끄는 정부가 독단적으로 끌어간다면 복수의 정치지도자가 국민의 선거로 선출돼 국가를 운영한다는 민주공화제에 부합하지 않는 것이었다.
그런데 버마 전문가들 사이엔 내가 위에서 주장한 것과 다른 견해를 내놓고 있는 연구자도 있다. 이 연구에 따르면, 아웅 산은 의회제도를 부정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혹자는 아웅 산의 국가사회주의는 강력한 국가가 정치적, 경제적으로 평등한 분배를 통해 평등을 달성하는 사회개량주의이라는 측면에서 전체주의와 유사점을 발견할 수 있어 이 부분은 의회제도를 부정한 히틀러의 파시즘과 연결될 수도 있다고 한다. 장준영, 『하프와 공작새 : 미얀마 현대정치 70년사』, 2017년)
그러면서도 이 연구는 아웅 산이 나치즘이나 파시즘과 달리 의회주의를 부정하지 않았고, 민주주의는 국민이 누려야 할 기본적인 가치로 판단했다고 주장했다. 비록 근대적인 의회제도가 서구사회의 개인주의 정신을 성숙시킬 수는 있을지 몰라도 그것은 행정과정을 지체시키거나 방해할 수 있는 세력이 될 수 있다고 경계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모호하게 기술된 이 점 역시 추후 엄밀하게 재검토돼야 할 과제다.)
이 점은 전제적인 측면이 존재했으면서도 히틀러의 길로는 들어서지 않은 아웅 산의 긍정적인 요인이었다고 볼 수도 있다. 또한 그는 강력한 리더십에 의해 운영되는 정당은 파당주의를 미연에 방지할 수 있고, 버마 역사 속에서 지속된 파벌주의도 일당체제로 종식될 수 있다고 믿었다. 다양한 종족으로 구성된 국가구성원은 근대국가에서 하나의 국민(민족)으로 통합될 필요성이 있었다. 이 점은 아웅 산이 버마 내 소수민족들의 자치권 나아가 그들이 원한다면 독립할 권리도 인정하겠다는 발언과 상당 부분 배치된다.
아웅 산의 사상적 특징의 또 다른 한 가지는 정치와 종교간의 관계에 대한 입장으로서 아웅 산은 정치와 종교의 분리, 즉 불교국가인 버마였지만 불교는 정치와 분리시켜야 한다고 본 점이다. 먼저 아웅 산은 종교는 정치에서 떠나 종교 본연의 역할만 하도록 하겠다는 생각이었다. 제정일치사회에서 제정분리, 정교분리라는 근대성을 득한 상태로 보이는 부분이다.
특히 아웅 산이 추고하고자 한 국가사회주의는 불교철학이 이면에 존재했다. 이 점은 버마 전체 국민의 90% 정도가 불교도인 버마라는 불교국가의 현실이 반영된 특이한 테제였다. 이는 실제로 그 뒤 아웅 산의 정치적 계승자에게 영향을 미쳤다. 따라서 아웅 산의 종교적 관점은 버마라는 불교국가에서 그냥 지나칠 순 없는 부분이다.
종교, 철학, 교리 등 비세속적인 일을 가리키는 ‘로꼬웃떠야’(Lawkouttaya)는 민주주의를, 또 현실의 문제를 실천하는 일을 의미하는 ‘로끼예’(Lawkiye)는 사회주의를 의미한다. 현세의 열반, 즉 로까 네이빤(Lawka-neibban)의 달성이 진정한 사회주의의 완성이다. 이 글의 제4장이나 제5장에서 보게 되겠지만 이러한 정의는 우 누 정권기를 거쳐 1962년부터 시작된 버마식 사회주의강령에서 명확히 드러난다.
그러나 아웅 산은 정치와 종교를 분명히 구분하자는 입장에서 불교사상과 그 세계관을 현실정치에 접목시켜선 안 될 것으로 인식했다. 아웅 산은 불교의 세계관이나 사상을 정치에 접목시키는 일은 무용한 것으로 보았으며, 정치와 종교 사이를 멈추고 선을 그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아웅 산은 종교를 무시하거나 폄하하지는 않았다. 그는 종족과 종교에 치중되는 민족주의운동의 특수성을 배제하고 모든 구성원의 평등을 주창함으로써 사회구조의 근본적 개혁을 도모하는 국민적 계몽을 유도했다. 이것이 종교는 정치에서 완전히 분리된 종교 본연의 역할로 국한되어야 한다는 그의 근대적이고 세속적인 통치철학의 근간이었다.
하지만 아웅 산은 영국을 창구로 해서 여과 없이 받아들인 서구의 정치사상과 정치제도 등은 불교가 세속권력과 밀착된 전통적인 버마의 민중들에게는 그대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따라서 아웅 산은 서구의 것들을 그대로 착근시키기보다 토착적인 전통문화에서 이것을 재해석해서 민족주의로 승화시키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서구에서 차용한 이데올로기를 버마에 적용하기엔 전통적 가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민중들과 버마사회에서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고충이 존재하다고 봤다. 중국, 조선처럼 정치 사회적 전환기에 후진국에서 보편적으로 나타난 현상이 버마에서도 나타난 것이다. 이와 관련해 그는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정치는 종교의 자유권을 포함하는 개인의 권리로 봐야 한다. (하지만) 우리는 종교와 정치 사이를 멈추고 선을 그어야 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했듯이 인간은 정치적 동물이고, 정치는 우리의 존재와 우리의 일속에 존재한다. (중략) 더 좋은 삶을 위해, 행복을 추구하기 위한 것이 정치다. (중략) 그래서 정치는 더러운 것도, 위험한 것도 아니며, 신비로운 마술도 아니다. 혹자는 정치가 종교라고 하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더러운 정치인들이 국민을 혼란시키고 삶의 본질을 감추기 위해 그렇게 말한다. 종교가 정치라고 말하는 자들은 진정한 정치인이 아니다.”(Maung Maung, Aung San of Burma, 1962, p.126)
위에서 “종교가 정치라고 말하는 자들”은 두말 할 것도 없이 수백 년 동안 세속권력까지 행사해온 불교지도자들이었음은 물론이다. 중세에서 근대에 이르는 서구사회에서 기독교가 그랬듯이, 또 티베트와 몽골처럼 수세기 동안 불교지도자들이 세속 권력까지 장악해온 신정국가들에서 흔히 나타나는 현상이 오랜 불교국가였던 버마에서도 존재했던 것이다.
그러나 신정체제를 거쳐 근대에 들어와 그것의 고리를 끊고 민주주의체제로 나아갔다. 그래서 서방사회에서는 이미 종교는 개인의 영역에 속하고, 정치는 세속적 문제를 다루는 영역이기 때문에 양자는 공존할 대상이 아니었다. 아웅 산은 버마사회에 존속돼온 종교의 정치화를 단연코 절연해야 한다고 보고 그것을 경계한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인류는 보편적으로 종교자유를 포함해서 개인의 권리를 추구해야 하지만 정치에 종교가 섞이게 되면 종교 본연의 정신이 도전 받게 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과거 한 때 불교 승려가 되고자 했다가 부모의 반대로 이루지 못한 과거가 있었던 아웅 산이었지만 1930년대 아웅 산이 젊은 시절 학생운동을 이끌면서 정치에 입문할 때부터 당시 선배들과 달리 승려들의 정치참여를 강력히 반대한 이유였다. 승려의 정치참여는 반근대적인 행태로서 그가 비판의 대상으로 삼았던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그는 ‘청년불교도연맹’(YMBA)과 ‘우리버마연맹’이 슬로건으로 내건 “우리 종족, 우리 종교, 우리 언어”에 대해서도 비판적인 입장이었다.
당시 독립 직전의 버마 사회엔 정치지도자는 승려여야 하며 왕조시대에 이룩한 전통, 종교, 언어, 문화, 관습 등을 고수해야 한다고 믿는 일파가 있었는가 하면, 외국의 버마 통치에는 군사적으로 저항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서구와 완벽하게 절연할 게 아니라 서구의 정치제도, 마르크시즘은 수용하자는 주장이 공존하고 있었다. 아웅 산은 후자의 입장에 섰었다. 공산주의자를 배제하고 사회주의자 가운데서 정교분리를 주창한 이는 아웅 산이 거의 유일했다.
지금까지 불세출의 인물 아웅 산의 정치적 리더십이나 그 사상적 궤적을 그려봤다. 이를 크게 네 가지 정도의 특징으로 종합할 수 있다. 그것은 국가의 국체 및 정체, 국가와 군의 관계, 사회경제, 정치와 종교의 관계에 관한 것들이다. 이외에도 개인적 성격 및 성향이 정치 혹은 국가정책을 통한 새로운 국가건설에 반영될 것임을 추론할 수 있는 것들이 있다. 두 가지 정도로 요약할 수 있다. 이는 아웅 산이 대외적으로 공표한 언설의 진정성, 달리 표현하면 변질될 가능성은 없는가 혹은 실현될 가능성을 점쳐볼 수 있는 요인들이다. 그에 대해선 아래와 같이 정리된다.
첫째, 아웅 산이 거짓말을 싫어하는 성격이 정치에 반영될 것이라는 점을 言明한 사실이다. 즉 지금이나 그때나 어느 나라에서든 정치인 치고 정직한 자는 가뭄에 콩 나듯이 드문 인간세상에서 아웅 산이 정직하게 국민들과 소통하겠다는 의지는 검증이 어느 정도 가능하고, 그것이 국민전체에게 정직한 정치지도자라로 인식된 것은 여타 정치지도자들과 비교되는 크게 돋보인다.
아웅 산을 만나 본 사람은 누구든지 공통적으로 말하는 것이 있다. 아웅 산 장군이 굉장히 솔직하고 정직한 성격이라는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발발 전, 영국 출신의 저명한 문학가 락사키(Lacksaki)는 아웅 산을 만나 본 후에 그렇게 말한 바 있다. 그런 점 때문에 그는 이 젊은 장군을 존경한다고 말했다. 아웅 산은 “국가에 한 번도 거짓말을 한 적이 없습니다”, “그것은 국민 여러분들이 다 아시고 있습니다. 특별히 설명할 필요가 없습니다”라면서 향후에도 그런 자세로 임하겠는 것을 간접적으로 밝혔다.
1945년 아웅 산 장군과 만나 군사작전 문제를 상의한 바 있는 영국군의 윌리엄 슬림(Sir William Slim) 장군 역시 아웅 산은 일생 동안 진실을 사랑해야 하고, 언제든지 진실만을 말할 수 있도록 자신감과 용기를 지녀야 한다고 말했다고 한다. 또 주변 사람들은 아웅 산이 자신이 그렇게 살았던 것처럼 그 스스로도 거짓을 말하지 않고 무엇이든지 솔직하고 정직한 삶을 살았다고 증언했다.
둘째, 아웅 산은 불교적 관점에서 세계와 정치를 바라봤다는 점이다. 그는 자신이 믿는 종교인 불교의 업보(Karma)설, 인과론을 믿어 의심치 않는 듯한 발언을 하곤 했다. 그는 개인뿐만 아니라 사회와 국가도 인과응보라는 율에서 움직여진다는 인식을 갖고 있었다. 그런 인식은 아웅 산이 1946년 12월 18일 버마의 딴부사얏(Thanbysayat) 추도식에서 행한 연설에 잘 나타나 있다. 이 추도식은 1942년부터 45년까지 3년 간 버마-태국 간 철도공사에 노무자로 동원돼 일하다가 사망한 버마인 노동자들을 위한 추모행사였다.
아웅 산은 일제에 의해 10만 명의 버마 국민들이 버마-샴(태국) 철도에서 일하기 위해 강제로 끌려가서 3~8만 명이 상상할 수 없는 비참한 상황에서 죽은 사실을 지적하면서 “일본 파시스트 야만인들이 이러한 잘못을 우리 조국과 국민들을 향해 자행했기에 우리는 완전한 분노로 끓어오르고 있”지만, 하늘이 내리는 “천벌이 그들을 가만 놔두지 않을 것을 알기에 안도합니다”라고 했다.
버마민족이 용감한 시민의식으로 파시스트들의 항전시위와 복수를 했지만, 아웅 산은 그것을 인과응보에 따른 정당한 것이라고 봤다. 그는 이렇게 얘기한 바 있다. “사람은 잘못한 만큼 천벌을 받는다는 인과응보의 진리가 있으므로 이것은 또한 피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만일 어느 개인이나 국가가 다른 사람들을 억압하고 순리와 사회적 정의를 착취하면 그 개인 또는 국가는 그 죗값을 치러야 하는 것입니다. (중략)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또는 한 국가가 다른 국가를 억압하고 착취하는 것이 계속된다면 이 세상은 천벌을 받도록 속박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엄격한 법도이고, 지나온 많은 역사의 사건들에서 분명하게 보여 집니다.”
아웅 산이 살아 있었다면 그가 제시한 국가건설에 대한 꿈, 혹은 비전이 제대로 지켜졌을까 하고 묻는 것은 현명하지 못한 비역사적 질의다. 단지 내가 위에서 제시한 그의 두 가지 특징으로 상상할 뿐이다. 그 이상의 단정적 서술은 역사연구자의 태도가 아니다.
2021. 2. 24. 10:25
북한산 淸勝齋에서
雲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