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얀마 현대사② 비극의 출발점 : 아웅 산 암살의 배경과 그 의미
그저께 미얀마 군부의 군사쿠데타 발발 뉴스를 듣고선 미얀마 현대사를 5회에 걸쳐 연재하기로 했지만 6회로 늘리기로 하고 그 두번째 글로서 오늘은 아웅 산의 암살에 대해 조금 더 자세하게 소개한다. 이 장은 원래 계획엔 없던 것이다. 두번째 주제인 아웅 산이 그린 건국 후 버마의 국가정체, 정치적 비전, 꿈을 소개하면서 그의 암살이 갖게 된 국가적 혹은 시대사적 손실 부분에서 간략하게 논급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렇게 했을 경우 전체적으로 아웅 산이 암살된 배경이 너무 소략하게 그려지게 되고, 그로 인해 그 뒤 군부가 왜 쿠데타를 자주 일으키는지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게 될 것이다. 그런 판단에서 아웅 산의 암살 관련 내용을 별도로 독립된 장으로 만들어 좀 더 구체적으로 밝히게 됐다. -2021. 2. 4. 17:33 雲靜
미얀마 현대사② 비극의 출발점 : 아웅 산 암살의 배경과 그 의미
1947년 7월 19일 토요일 아침, 총기로 무장하고 지프차를 탄 정체불명의 무리들이 랑군 시내 중심부에 위치한 유엔 사무국 건물 내 임시정부의 행정부 본청으로 들이닥쳤다. 그 시각, 그곳 회의실에선 아웅 산이 32세에 불과한 버마 독립운동의 영웅이자 정식으로 독립되기 이전 자치정부 내각의 수상 겸 국방부장관과 외무부장관의 자격으로 6개월 뒤에 있을 영국의 버마 철수 후 랑군의 영국 식민지행정청으로부터 국가권력을 이양 받기 위한 각료회의를 주재하고 있었다.
범인들이 정부청사 건물로 들어섰을 때 사무실 앞 초소에는 경비병들이 철수하고 없었다. 아웅 산의 지시에 따른 것이었다. 그해 7월초 영국군 부대의 병기고에서 총기가 불법으로 유출됐다는 정보를 보고 받은 내무부장관 우 미야(U Mya)는 보안 부대원들을 무장시켜 아웅 산 장군의 사무실 경비를 강화시켰지만 이 사실을 아웅 산에겐 보고하지 않았다.
다음날 출근길에 정부청사 사무실 안으로 들어가던 아웅 산이 총기로 무장한 경비병들을 보고 부관을 통해 내무부 장관에게 경비병들을 철수시키도록 했다. 아웅 산은 자신이 암살 될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그날 저녁 아웅 산은 부관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죽음을 무서워하지 않는다. 또한 나를 암살할 사람도 없을 것이다.” 그는 자기 가족이 사는 관저에만 무장경비병을 두게 했을 뿐이다.
이 시기 아웅 산은 애틀리의 독립약속을 받아낸 뒤 1947년 1월 27일 버마로 돌아와서 찾아간 버마 내 소수민족 지도자들과 만나 영국으로부터 독립하기 위해 모든 민족이 서로 단결해야 된다고 역설했다. 그리고 만약 소수민족들이 독립하고자 버마 연방에서 탈퇴하겠다면 그것은 자유이고, 그 의사를 막지 않겠다고 약속하면서 그들을 설득했다. 소수민족 지도자들은 아웅 산의 솔직함과 인품을 높이 평가하고 존경해마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독립된 버마연방의 일원으로 참여하겠다는 약속을 해줬다.
아웅 산은 영국 철수 시 영국으로부터 이양 받을 권한이나 제반 문제들의 해결할 방안을 마련하기 위해 자치정부 행정내각 요원들과 함께 회의를 주재해왔다. 그 이전 갈론 우 쏘가 수상 재임 시절에 매주 토요일에 해오던 내각회의를 수요일로 바꾸어서 진행해오던 중이었다.
그런데 운명의 장난인지 아웅 산은 7월 세 번째 각료회의를 지정된 대로 수요일인 7월 16일에 열려고 회의 초청장을 각부 장관들에게 돌렸다. 그런데 수요일 그날에는 이미 정부의 또 다른 중요한 회의가 정해져 있어서 두 회의가 겹치는 것을 피하고자 아웅 산은 수요일로 예정된 다른 회의를 그대로 수요일에 하게 하고 자신이 주재할 각료회의는 토요일로 변경하여 각료들에게 다시 초청장을 보냈다.
한편, 전직 총리 갈론 우 쏘는 내각 회의가 수요일로 바뀐 줄 모르고 범행자들을 7월 19일 토요일 오전에 행정부 본청으로 보냈다. 범인들은 바로 회의실로 들어가자마자 무차별로 총기를 난사했다. 말이 난사이지 사실 정확하게 얘기하면 아웅 산을 표적으로 한 조준 사격이었다. 앞장에서 소개한 바 있듯이 아웅산 장군이 13발이라는 가장 많은 총탄을 맞은 것이 이를 말해준다. 아웅 산에게만 난사한 자는 두 사람, 마웅 세인(Maung Sein)과 얀 지 아웅(Yan Gyi Aung)이었다.
즉사한 아웅 산 외에 이 때 같이 살해된 8명은 아래와 같다.
1) 우 바 초(U Ba Choe, 54세) 작가이자 기자, 잡지사의 편집장으로서 정보부 위원회 위원. 총알 5발을 목과 머리에 맞았음에도 즉사하지 않고 랑군 종합병원으로 긴급 후송되어 치료 받던 중 그날 오후에 사망했다.
2) 우 미아(U Mya, 49세) 젊은 정치 지도자들 중의 한 사람으로서 내무부 장관으로서 아웅 산 사무실 경비병들을 철수시킨 장본인이었다. 당시 그는 장관 겸 금융위원회 위원이었는데, 총알이 폐를 관통하여 현장에서 사망했다.
3) 우 압둘 라작(U Abdul Razak, 49세) 버마 제2의 도시 만달레이의 이슬람 지도자로서 교육부와 국가개발위원회 위원. 여섯 발의 총알을 맞고 현장에서 사망.
4) 우 바 윈(U Ba Win, 46세) 아웅산 장군의 형이고 상무와 예산위원회 위원. 총알 8발을 맞고 현장에서 사망.
5) 만 바 카잉(Mahn Ba Khaing, 43세) 버마 소수민족 카렌족(Karen) 출신의 일제 식민 지배 당시 항일운동에 참여한 독립운동가로서 산업과 노동부 위원. 15발의 총알을 맞고 심장이 파열돼 현장에서 사망.
6) 샤오 산 툰(Sao San Htun, 40세) 샨 주(태국, 라오스, 중국의 운남성과 국경을 접한 지역)의 몽폰 국경지역부 위원. 두 발의 총알을 머리에 맞고 랑군 종합병원으로 긴급 후송되어 치료를 받았으나 다음날 20일 오후 12시에 사망.
7) 우 온 마웅(U Ohn Maung, 34세) 교통통신부 서기관. 보고 자료를 지참하여 회의실을 방문했다가 총탄을 맞고 현장에서 사망.
8) 고 튀에(Ko Htwe, 18세) 만달레이에서 온 이슬람 청년으로서 우 압둘 라작의 경호원. 경비실에서 대기 하던 중 회의실에서 나는 총격소리를 듣고 현장으로 접근하다가 범인들에게 구타를 당해 네 곳에 부상을 크게 당한 뒤 병원에서 치료 중 사망.
사망자들은 전원 쉐다곤 파고다 인근의 ‘순교자의 묘’에 안장됐다. 내가 참배한 곳인데, 지난 번 글에서 사진으로 소개한 바 있다.
범행자들은 누구였을까? 4명이 전부였을까? 위에서 밝혔듯이 범인들을 보낸 것은 갈론 우 쏘였기 때문에 단독범은 아니었고 배후가 있었다는 점은 알 수 있다. 그런데 갈론 우 쏘는 왜 아웅 산을 죽이려고 했을까? 아웅 산이 왜 암살당했는가를 이해하면 현재 미얀마에서 군부의 쿠데타가 왜 저렇게 빈발하는지 그 원인의 3분의 1 정도는 이해할 수 있다. 나머지 3분의 1은 1958년 1월 버마 정부가 소수민족의 독립약속을 파기한 것에서, 또 다른 나머지 3분의 1은 버마 군부의 여러 세력의 대립에서 찾을 수 있다.
암살범들은 체포된 뒤에야 총 10명이었다는 것을 알게 됐다. 범인들은 아래와 같다. 범인들의 신상은 피살자들 보다 자세하지 않다. 아웅 산 암살을 배후에서 교사한 주범이자 교사범은 앞장에서 소개된 갈론 우 쏘였다. 1890년 생인 그는 영국 총독이 직접 내정한 식민정부의 마지막 수상으로 임명돼 1940년 9월~42년 1월까지 수상을 역임한 바 있다. 또한 1942년~46년까지 아프리카 우간다에서 포로로 지낸 경력에다 당시 "SUN"(태양) 신문의 설립자이자 묘칫(Myochit 애국자)당 지도자였으며, 우익 원로 정치인으로서 아웅 산의 정치적 경쟁자이기도 했다.
갈론 우 쏘는 이날 아웅 산 및 행정부 각료들을 암살토록 사주한 살인죄로 체포돼 대법원에까지 올라간 재판을 거쳐 1948년 5월 8일 사형에 처해졌다. 그와 같이 처결되거나 징역형을 받은 나머지 9명은 아래와 같다.
1) 마웅 쏘(Maung Soe) 총기 살해범.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 받고 1948년 5월에 처형됨.
2) 텟 힌(Thet Hnin) 총기 살해범.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 받고 1948년 5월에 처형됨.
3) 마웅 세인 총기 살해범.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 받고 1948년 5월에 처형됨.
4) 얀 지 아웅. 총기 살해범.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 받고 1948년 5월에 처형됨. 범인들 중 최연소 살해범.
5) 투 까(Thu Kha) 범인들을 각료 회의 사무실까지 운송한 지프차의 운전기사. 재판에서 사형 선고를 언도 받았지만 20년 징역으로 감형됨.
6) 킨 마웅 인(Khin Maung Yin) 공범자로 재판에서 사형 선고를 받았지만 20년 징역으로 감형됨.
7) 마웅 니(Maung Ni) 공범자로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 받았지만 20년 징역으로 감형됨.
8) 흐몬 지(Hmon Gyi) 공범자로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 받고 1948년 5월에 처형됨.
9) 바 뉜트(Ba Nyunt) 우 쏘의 부관으로서 부하들 중에서 좌장 격. 우 누(U Nu)를 암살하라는 지시를 받아 범행에 가담했고, 재판에서 조건부 면죄를 받아 10년 6개월의 징역을 선고 받음.
그러면 갈론 우 쏘는 왜 아웅 산을 제거하기로 마음먹었을까? 그 배경과 동기는 무엇이었을까?
갈론 우 쏘는 철저하게 영국 식민지 정책에 찬성하고 아웅 산이 추진하고 있던 버마의 독립을 끝까지 반대해온 인물이었다. 그는 아웅 산이 영국 런던에까지 가서 수상 애틀리와 버마를 독립시키기로 약속한 협정인 1947년의 ‘아웅 산-애틀리 합의’도 인정하지 않고 극렬하게 반대해온 독립반대자로서 한 마디로 말해서 친영 매국노였다.
갈론 우 쏘는 전임 수상 직에 있었을 때 동부 아프리카 우간다 방문에서 돌아온 뒤 수상 자리에서 물러나 묘칫당의 당수로서 랑군의 영국 식민행정청의 버마 독립 지연과 소수민족의 독립반대 정책에 동조하면서 1946년 아웅 산이 조직하고 이끌던 반파시스트 인민자유동맹(Anti-Fascist People's Freedom League, 약칭 AFPFL, 이하 AFPFL으로 칭함)과 대립각을 세워오고 있었다.
필자가 보기에 갈론 우 쏘가 아웅 산을 살해하려고 한 동기는 크게 대략 네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는 아웅 산에 대한 개인적인 악감정이었다. 자신이 물러난 뒤 자기보다 나이가 25세나 어려 아들 뻘 되던 30대 초반의 젊은 아웅 산이 자치정부의 수상 자리에 앉게 된 것이 달가울 리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다 국민들의 영웅이 돼 있는 아웅 산이 날로 인기가 치솟고 있었다. 갈론 우 쏘는 이에 대한 시기와 질투 그리고 불안감도 날로 더해갔다.
둘째, 자신이 생명처럼 반대해온 버마의 독립도 아웅 산 때문에 이뤄질 판이었다. 영국이 아웅 산에게 버마를 독립시켜 줄 수 있는 조건의 한 가지로 내건 버마 영내 소수민족들의 연방참여에 대한 동의도 아웅 산의 노력과 신망에 힘입어 그다지 멀지 않아 성사될 판이었다. 아웅 산은 1947년 1월 13일부터 1월 27일 동안 런던에서 이뤄진 클레멘트 애틀리(Clement Attlee)와의 담판에서 1년 후 버마는 독립한다는 ‘아웅산-애틀리 합의’를 이끌어 낸 뒤 귀국했다.
그리고 이 아웅 산-애틀리 협정의 합의문에 부가돼 있는 조건(단서조항)도 아웅 산이 성공적으로 달성하게 된 상황이다. 협정 제3조에 “소수민족과 버마 민족이 함께 연합하여 독립을 원한다는 협의를 맺은 후 문서로 작성한다”는 내용이 있다. 요컨대 아웅 산이 만약 산간지역의 여러 소수 민족을 평지의 버마 민족과 함께 독립을 하여 연방국가로 만들고 싶다면 소수민족들이 연방국에 가입한다는 동의서를 추가 합의문으로 영국에게 제시해야 한다는 것이다.
아웅 산은 당 동지들과 함께 소수민족을 대상으로 한 전국 순회 연설을 지속하는 등 소수민족 지역들과 연합을 공고히 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 결과 아웅 산의 순회 연설을 들은 산지 지역의 소수민족 지도자들과 주민들은 그를 절대적으로 신임하게 됐다. 아웅 산에 대한 소수민족의 믿음과 존경이 밑거름이 돼 1947년 2월 12일 오전 10시 아웅 산은 22명의 소수 다민족 지도자들과 함께 버마 연방 독립을 찬성하는 내용을 담은 “민족 일치단결 협약서”, 즉 역사적인 ‘빵롱 협약’(Panglong Agreement)에 서명하게 된 것이다.
셋째, 랑군의 영국 총독부도 끝까지 소수민족들의 주거지역을 평지 지역인 버마족의 독립과 별개로 분리시켜서 식민통치를 연장시켜 보려고 여러 가지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아웅 산의 활동을 저지하려고 했다.
아웅 산의 노력으로 영국군을 이용해서 일본군을 쫓아낸 것은 성공했지만, 그 뒤 버마에 다시 들어온 영국은 소수민족에 대한 통치로 거둬들이던 기득권을 잃지 않기 위해 버마와 식민통치 유지하려고 평지의 버마족과 산지의 비버마족을 분리시키고 대립시켜서 버마를 식민지배지로 영속화하려고 기도해왔던 것이다. 하지만 아웅 산의 의지를 꺾을 수 없는 한 더 이상 수단이 없었다. 만약 1년 후로 약정한 독립일이 불과 반 년 밖에 남지 않았는데, 아웅 산을 살려두면 독립이 되는 것은 필지의 사실이다.
그렇게 된다면 대버마주의를 고수한 우익 세력들은 소수민족에 대한 통치권을 다 내려놓아야 하고, 그로 인해 자신과 자기 당의 기득권도 되돌려줘야 할 처지다. 소수민족들이 거주하는 산간 지역은 버마족이 살고 있는 평원지대 보다 각종 산림자원, 지하자원 등의 보고를 다 포기해야 할 판이다. 그에 그치지 않고 나아가 자신은 어쩌면 반민족인사로 법적으로 단죄될 수도 있는 것을 예상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넷째, 자신의 당이 소수가 되고 아웅 산의 당은 다수당이 되면서 정치적인 고립감이 작용했을 수 있다. 이것은 자신과 자신의 정치세력을 방어할 수 있는 수단이 없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1947년 4월 자유 총선거에서 아웅 산의 AFPFL은 유권자들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아 단독으로 헌법 제정을 위한 의회를 구성하는 다수당이 되었다. 전적으로 소수민족의 신임과 지지를 받은 아웅 산의 공헌에 힘입은 바 컸다. 이와 대조적으로 자신의 묘칫당은 날로 당세가 기울어져가고 있었다.
아웅 산은 그 전부터 줄곧 버마 정국의 초점 인물이었지만 특히 독립을 1년 정도 남겨 놓은 시점에서부터는 버마연방을 건설하기로 한 것에 동의한 버마족과 여타 소수민족들 그리고 버마독립을 반대한 영국의 버마식민정부와 버마내 반독립세력이 모두 아웅 산 한 몸에 관심을 집중시키고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처럼 버마가 연방 독립국으로 가는 길이 현실성이 높아지자 갈론 우 쏘는 결국 아웅 산을 없애기로 작정했다. 그런데 또 다른 의문도 놓쳐선 안 될 것이다. 과연 아웅 산을 제거하는데 갈론 혼자만의 단독범일까, 즉 그의 배후에 소수민족에 대한 식민통치를 놓지 않으려는 랑군의 영국 식민지 총독과는 공모하지 않았을까 하는 점이다.
그런 관점에서 갈론 우 쏘가 버마독립과 소수민족의 독립을 반대하는 랑군의 영국 식민지정부, 영국 식민정부의 하수인이 돼서 아웅 산을 살해한 것이 아닐까? 충분히 있을 수 있는 개연성이 높아서 연관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영국 총독과의 공모를 한 것인지에 대해선 아직 자료를 찾아 볼 수 없어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버마가 영국의 식민지로 전락하기 전 버마 내에 여러 가지 문제들이 존재한 점(태국, 인도, 중국, 라오스 사이에 국경이 불분명한 점, 소수민족의 대립(이 점은 훗날 버마 군부의 독자적 기반이 공고해지는 역사적 배경이 됨)이 훗날 버마 군부의 잦은 쿠데타의 배경이 된 점에 대해선 설명을 다음 기회로 미룬다.
이제 이 장의 마지막 부분을 소개하고 끝내려고 한다. 아웅 산이 살해당한 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가 하는 점을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겠다. 한 마디로 잘라 말하면 소수민족의 신뢰를 상실하게 된 점을 꼽을 수 있을 것이고, 군부에 대한 통제력이 사라졌으며, 그의 이상이었던 국가사회주의를 실행할 수 있는 기회 역시 상실됐음을 의미한다.(이에 관한 구체적인 내용도 다음 장에서 설명할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보면 아웅 산이 천수를 누려 군을 장악하고 문민화를 이뤘다면 오늘날 미얀마 군부의 빈번한 쿠데타는 방지할 수 있었을 것으로 생각될 수도 있다. 논리적으로는 그렇게 볼 수도 있지만 현실적으로 그가 오랫동안 살아서 군부를 통제했다고 하더라도 여러 가지 여건상 군의 문민화는 쉽지 않았을 것으로 판단된다.
종합하면, 아웅 산의 죽음은 다수민족인 버마족뿐만 아니라 비버마족의 전체 소수민족들까지도 신뢰하고 믿고 따르던 지도자가 사라졌음을 의미했음과 동시에 군부를 통제할 수 있는 컨트롤 타워나 힘이 사라졌음을 뜻했다. 그를 대신할 인물은 없었을까? 마치 오늘날 미얀마에 그의 딸 아웅 산 수찌 여사의 권위나 역할을 대신하거나 이어 받을 지도적 인물이 빈약한 것도 동일한 상황이다.
아웅 산 유고 후, 우 누가 아웅 산이 닦아 놓은 길을 따라 영국 수상 애틀리를 만나 버마를 평지의 버마족과 산지의 비버마족이 참여하는 연방국가로 독립시킬 것을 약속한 '아웅 산-애틀리 협약'에 서명했고 1948년 1월 4일 독립공화국이 된 뒤 버마의 초대 총리가 됐다. 또 우 누는 아웅 산에 이어 군의 최고 통수권자인 국방장관도 되었지만 아웅 산만큼 군부를 장악해서 통제할 수 있는 능력이 없었다. 우 누는 국가 권력을 거머쥐게 됐고, 독실한 불교도로서 뛰어난 지식인이기도 했지만 아웅 산 같은 강인함과 카리스마가 없었던 것이다. (제2장 끝)